<몰아 보고 싶어요?> 

         글/이일준(정신건강의학 전문의)

         feature editor KIM EUN HEE

 

 

     구독 가능한 OTT (Over The Top : 셋톱박스(Top)를 넘어) 플랫폼이 많아졌다.

     넷플릭스는 정기구독으로 보고 있고 티빙은 보고싶은 프로그램이 있을때 월별 결제해서 보곤한다.

     사실 나는 드라마를 볼때 매주 다음화를 기다리지 못해 종영이 된 후에 1화부터 시작한다.

     즉, 몰아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몰아 보고 싶어요?' 제목을 보고 글을 안 읽을수가 없었다.

 

     보통 콘텐츠 제공자들은 드라마 방영 시간에 맞춰 일주일에 1-2편씩 콘텐츠를 공개하지만 

     넷플릭스는 전편을 한번에 공개하는 몰아보기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드라마 '모범형사2'를 재밌게 봤는데 티빙에서는 매주 1-2편씩 공개가 되었는데

     넷플릭스는 '모범형사2' 종영 후 전편(1화-16화)을 한번에 공개 했다. 

     이러한 몰아보기 전략에 대해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는

     소비자들이 점점 더 컨트롤의 자유를 원한다고 이야기했다.

     소비자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자율을 주는것.

     원하는 시간에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보고 싶은것을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넷플릭스의 몰아보기 전략이 소비자들에게 컨트롤의 자유를 준 것일까? 

 

     본문 내용에서 에디터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매트릭스1>의 한장면으로 오라클이 주인공 네오에게 "꽃병을 조심해"라고 한다.

     깜짝 놀란 네오는 뒤돌아보다 꽃병을 건드려 넘어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꽃병을 깨뜨린 건 네오일까, 오라클일까?

     난 당연히 네오라고 생각했다. 네오가 꽃병을 건드려서 넘어뜨린거니까 네오가 꽃병을 깨뜨린거라고 할 수 있지만

     오라클의 말에 네오가 놀라서 꽃병을 깨뜨리게 된거이기도 하니까 오라클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행동은 네오가 했지만, 그 행동에 대한 통제권은 오라클이 쥐고 있었던 것이라고.

 

     넷플릭스로 돌아가서 넷플릭스는 시청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지만 이 선택의 폭이 정말 소비자에게 자유를 준것일까?

     넷플릭스를 보느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밤새도록 보느라 잠도 못자고, 그 다음날 일에 지장이 생긴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잠을 못자고,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일에 지장이 생기게 한 건, 즉 몰아 보기 했던 그 행동의 주체는

     나일까, 콘텐츠를 제공한 넷플릭스일까? 

 

     행동의 주체를 찾을 때 중요한 질문 중 하나로 'Cui Bono Question' 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라틴어로  '그것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라는 뜻이다.

     현대 사회에는 여가 시간이 점점 느는 만큼 어느 기업이 사람들의 시간을 많이 점유하느냐가 기업의 미래 성장성을 좌우한다는

     의견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자사 앱에 사람들이 오래 머물도록 애쓴다.

     결국 사람들이 돈을 소비하는 시간은 여가 시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몰아 보기 전략은 넷플릭스 안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 이고 그렇다면 이익이 되는 건

     당연히 넷플릭스 아닐까?

     결론적으로 넷플릭스의 몰아 보기 전략이 시청자들에게 통제력을 준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 넷플릭스의 몰아 보기 전략이 중독, 과잉, 통제력 부족이라는 부정적인 함의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넷플릭스는 어떤 전략을 짜면 이용자들이 더 오래 넷플릭스에 머물지를 연구하고 적용하는, 기업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는,

     소비자의 중독을 유발하는 집단일 뿐이다.

     갖가지의 전략이 치밀해질수록 어쩌면 미래의 우리는 중독을 유발하려는 기업과의 처절한 사투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기업들이 우리에게 내어준 자유를 진짜 자유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인문학도들은 무엇을 찾고 있기에 인문학을 택했나

올해 고등학교 수능 모의고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이과 응시생 수가 문과 응시생 수를 추월했다는 어느 저녁 뉴스는 오늘 이 기록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취업률, 채용 인원, 월 평균 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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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다 GQ 매거진에 실린 한림대학교 생명교육융합학과 대학원(생사학 연구소) 양준석님의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다.

 

  한림대학교 생명교육융합학과는 죽음에 대해서 공부하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학교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학과명에 '죽을 사' 자가 들어가는 것을 교육부에서 받아주지 않아 '생명교육', 그리고 죽음을 다루려면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이 어우러져야 하니 '융합학' , 이를 합쳐서 학과명을 지었다고 한다.

 

  그럼 어떤 것을 배울까?

 

  우선 생사학(삶과 죽음에 관해서 다루는 학문)에 관련된 여러 고전을 살피고 생사관(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태도나 사상)에 대해 공부한다.

  또한 임종기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호스피스나 남아 있는 가족이 새롭게 출발 할 수 있게끔 하는 애도와 관련된

  주제, 사망과 관련된 법도 다룬다.  즉,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 그리고 사별 이후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고 그들을 어떻게 상담할 것인지에 대해 배운다.

 

  공부를 함으로써 '죽음'을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내가 먼저 나아가서 죽음을 맞이해야 겠다는 마음이 생긴다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산소 호흡기로 숨을 불어넣으면 몇 십년을 살려둘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살고 싶은가?

  우리나라에서는 존엄사(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를 시행중이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더 이상 연명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환자 자신이 사전에

  관련 서류를 내거나 가족의 동의를 받을 경우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준비할 시간이 생기고, 죽고 나면 남는 것(유산, 화장을 매장을 할지 등)에 대해서 미리 정리 해 두는 시간 또한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은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에 대해 하고있는 준비가 있나?' 라는 질문에 양준석님의 대답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여행하다 적당한 데가 있으면 그곳 병원에서 마무리 하고 싶다.
그리고 여행을 가기전에는 생전 장례식이라고 해서 생일 파티 하듯 미리 사람들을 초대해 나 죽었을 때
부조하지 말고 지금해라 해서 그 돈 가지고 여행하겠다. 죽은 후에 와서 해주는 위로도 좋지만 실제로 본인이
위로 받고 싶은 것도 있지 않나. 내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준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감사하겠지만 사실 갑작스러운 죽음, 일방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처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가진 인생관은 '내일'이다.

  '내일 할 거야, 다음에 할 거야.' 가 아닌 오늘,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양준석님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문양으로 그려지기를 바라는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이 어떠하면 좋겠는지를 본인이 생각하고 살아야 그와 비슷한 무늬가 남는다고.

  내 삶은 죽었지만 그 무늬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어떻게 보면 또 살아 있는 것이지 아니겠냐고.

 

  나는 어떤 무늬를 남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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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사 vs 안락사

  존엄사는 사망이 임박한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치료로도 회생, 회복 불가능)를 중단하는 것으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고 안락사는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약물 투여로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존엄사만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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